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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물찻오름에서의 여름

sydneyman 2006. 4. 25. 09:07


지난 여름 석달을 물찻오름에서 살았다.
넘쳐나는 생명의 활기로 풍요로웠던 곳,
순간순간 찾아드는 적막함이 가슴시리게 아름다웠던 물찻오름.



눈을 감으면 들리는 소리는 아름드리 서어나무의 가지를 흔드는 바람소리,
잎 넓은 사람주나무에 앉아 쉬어가는 햇살의 웃음소리,
딱따구리의 노동요, 휘파람새의 유혹의 노래,
구국~ 거리는산비둘기의 삶의 넋두리...



물찻오름 입구에 차를 세우면, 하늘보다 넓은 숲이 그 곳에 있었다. 나무와 나무 사이로 스며드는 햇살은 자신을 형상화 시키면서 숲으로 내려와
쪽동백나무의 펑퍼짐한 잎사귀에 텅~~하니 내려 앉으면,
쪽동백나무는 감당할수 없는 무게로 출렁인다.

아름드리 교목들과 키 큰 나무들을 칭칭 감아 올라 간 등수국, 바위수국, 송악등의 넝쿨식물들이
천연원시림의 향기와 습기를 만들어 내고, 산수국과 관중, 조릿대 등은
사람의 눈 높이 아래에서 그 푸르름이 무성하다.



여름과 가을을 가르는 길목에선 물봉선이 제일 눈에 띈다.
가느다란 줄기 끝에 목이 긴 여인처럼 서 있다가는 한 줄기 미풍에도 소스라치곤 한다.
반그늘이 드리워진 환경을 찾아 으슥한 도랑가 쯤에 탱글탱글 여믄 씨방을 한 두 개씩 매달고는
누군가 지나면서 자신을 건드려주길 바란다.

어쩌다 스친 옷깃에도 자지러지게 톡톡 터지는 물봉선의 씨방..
일 없이 죄지은 사람처럼 괜히 미안해지는 마음으로 들여다 보면 물봉선은 배시시 웃고 있다.
그렇게 터져서 멀리멀리 종자를 튕겨 보내는 것이다.
그래서 봉선인 것이다.



비록 인간의 기준에서 이름 지워졌지만 한 장소에서 헝클어지듯 어우러져 사는,
그 녀석이 그 녀석 같은 식물들을 사람의 얼굴 익히듯 하나하나 이름을 익혀가는 재미는 사뭇 쏠쏠하다.



이름 모를 나무, 이름 모를 들꽃이 산딸나무가 되고 누린내풀이 되고 눈물버섯이 되는 것이다.
이렇게 알고져 다가가는 그 과정에서 싹트는 애정은 즐기기 위하여 자연을 찾기 시작한 사람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승화시켜 놓는다. 그들과 팽이는 동등하게 눈높이를 맞추어 니나내나 다를 바 없는 자연속의 한 부분임을 깨닿게 만드는 것이다.



9월 하순에 접어들면서 사람주나무잎에서부터 가을이 왔다.
많지는 않지만 억새꽃이 붉으레하니 피어나 제법 가을길을 만들어 내고, 산딸나무 열매가 빠알갛게 익어간다.
임도 어느만치서 툭툭 벌어져 떨어지던 밤송이, 으름도 주렁주렁 달려 풍성함을 보탠다.



본래 산열매는 산새들의 몫이겠지만 쩍 벌어진 으름을 보고는 욕심이 동해서 서너 개를 약탈하고 말았다.
내가 꼭 필요한 것도 아니면서, 배가 고파 먹이가 필요한 게 아니면서,
인간은 필요 이상의 그 무엇을 항상 얻으려 하는 욕심쟁이, 그래서 자연의 약탈자일 수 밖에..
인간이 자주 다니는 길목에선 떨어진 밤송이, 혹은 도토리조차도
다람쥐의 겨울식량이 아니고 감성의 사치품으로 사람이 주어가고 마는 것이다.



한 종의 야생버섯이라도 더 찾아보려고 무릎으로 기어다니다시피 보낸 물찻오름에서의 여름,
버섯들의 번식기도 이제 끝나가므로 그들은 다시 한 해 동안 지하세계로 침잠해 들 것이다.
2005년의 여름은 숲과 버섯과 벌레 물린 두드러기와 함께 그 곳에서 흘린 땀방울만큼 아름다웠다.



숲 속 나무의 그림자가 고무줄처럼 길어져 간다.

 

출처 : 물찻오름에서의 여름
글쓴이 : 팽이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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